국민연금, 기대와 현실의 괴리
선진국 따라가려다 길 잃은 한국
전문가들 “예측 틀 자체를 바꿔야”
국민연금 재정 전망의 핵심 가정이었던 ‘선진국 수렴 가설’이 흔들리고 있다.
한국의 생산성과 고용 구조가 미국이나 일본처럼 변화할 것이라는 전제가 통계적으로 뚜렷한 근거가 없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국민연금 재정 추계의 핵심 가정이었던 이 전제가 흔들리면서, 기존 예측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장기 정책 수립 방식의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선진국 따라간다는 착시… 실제론 ‘다른 길’
국민연금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인구·경제변수의 수렴성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생산성과 고용구조가 선진국 수준으로 수렴한다는 통념은 통계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노동생산성은 과거 일본을 일시적으로 앞지른 사례가 있었지만, 장기적인 시계열 분석에서는 주요 7개국(G7)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와 수렴하는 경향은 확인되지 않았다.
보고서는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둔화하고 있으며, 이는 국내총생산(GDP) 증가세보다 취업자 수 증가세가 더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고용 구조도 다르다… 여성·고령층 중심
고용 구조에서도 한국은 선진국과 차이를 보였다. 전체 경제활동참가율 증가는 여성의 참여 확대로 인한 것이었고, 남성은 오히려 소폭 감소했다.
출산과 육아로 노동시장에서 이탈했다가 다시 진입하는 ‘M자형’ 여성 고용 패턴도 일본 등에서는 완화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뚜렷했다.
반면, 70세 이상 고령층의 경제활동참가율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보고서는 이러한 특이한 고용 구조가 선진국 모델과는 다른 경로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남녀 연령대별 고용률을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한 결과, 장기적으로 유사한 형태로 수렴할 가능성은 낮다는 결론이 나왔다.
청년층 연금 사각지대… 구조적 취약성 누적
청년층의 낮은 연금 가입률도 국민연금 재정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으로 지적됐다.
국민연금연구원이 발표한 ‘청년층을 위한 국민연금 가입 기간 확충 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18~24세의 국민연금 가입률은 24.3%에 불과했다.
취업 지연, 불안정한 일자리, 군복무 등으로 인해 연금 가입이 늦어지고 있다. 25~29세가 돼서야 절반을 넘지만, 이 또한 OECD 평균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해 장기적으로 수령하는 연금액도 줄어든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취업이 5년 늦어지고 실업 기간이 10년 지속될 경우, 연금액은 정상 가입 대비 30% 넘게 줄어든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연금 납부의 핵심 기반이 되는 청년층의 기여가 줄어들면, 전체 제도의 지속 가능성은 더욱 위협받게 된다.
현행 크레딧 제도는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도 나온다. 연구진은 군복무 전체 기간에 대한 인정, 첫째 자녀부터의 출산 크레딧 적용 등 실질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단순한 시기 조정으론 한계… 구조 개편 필요
국민연금 적립기금은 현행 제도가 유지될 경우 2055~2056년에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부 제도 개편으로 고갈 시점을 2064년으로 늦출 수는 있지만, 구조적인 재정 불안정은 해소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시기 조정이 아니라, 세대 간 형평성과 재정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국민연금은 노후 소득을 보장하는 핵심 제도인 만큼, 현실에 맞는 데이터 기반 정책 설계가 더는 미뤄져선 안 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