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기차 시장에서 가격 경쟁을 거부하고 기술 우위로 승부를 걸겠다는 선언이 나왔다. 지리 오토는 24일(현지시각) 800V 초고속 충전 기술을 앞세워 ‘내장(內臟·원가 이하 판매)’에서 탈피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2026년 1월 구매세 면제 폐지로 중국 전기차 판매가 전년 대비 20% 급감하고, 50개 완성차 업체 중 극소수만 수익을 내는 위기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업계는 중국 전기차 시장이 ‘가격 전쟁’에서 ‘기술 경쟁’으로 전환하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지리 오토 CEO 간 지아위는 “원가보다 저렴하게 제품을 판매하는 출혈 경쟁에 반대한다”며 “기술·품질·브랜드·서비스를 바탕으로 시장에서 경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지난 2년간 테슬라와 BYD가 주도한 가격 인하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중국 전기차 시장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한다.
싱위안 46만대 판매 1위…10분 충전 400km 목표
지리 오토가 생산하는 싱위안은 2025년 46만 대를 판매하며 중국 본토 순수 전기차 판매 1위를 기록했다. 가격은 6만 8,800위안(약 1,400만 원)에서 9만 8,800위안으로 테슬라 모델Y(26만~31만 위안)나 BYD 시걸(6만 9,800~8만 5,800위안)보다 저렴해 저가 시장을 장악했다.
현재 싱위안은 한 번 충전 시 최대 310km 주행이 가능하고, 20분 충전 후 200km 주행거리를 제공한다. 지리는 800V 초고속 시스템과 고성능 배터리를 결합해 10분 충전 후 최대 400km 주행을 구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는 현재 20분 충전 200km 대비 충전 시간은 절반으로 줄이고 주행거리는 2배로 늘리는 것으로, 전기차의 가장 큰 약점인 주행거리 불안(Range Anxiety)을 해소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이다. 지리는 2024년 12월 저장성 닝보에 20억 위안 규모의 세계 최대 안전 시험 시설을 개설하며 기술 투자를 가속화하고 있다.
중국 전기차 시장 ‘수익성 위기’…50개 업체 중 극소수만 흑자
지리의 ‘내장 거부’ 선언은 중국 전기차 시장의 심각한 수익성 악화를 배경으로 한다. 업계 분석에 따르면, 중국 본토 기반 전기차 제조사 50곳 중 극소수만이 수익을 내고 있다. 심지어 중국 최대 전기차 업체 BYD조차 2025년 3분기 순이익이 전년 대비 32% 감소했다.
2024년 기준 테슬라 모델Y는 38만 2,300대로 전년 대비 21% 감소했고, BYD 시걸도 31만 대로 31% 감소하며 가격 경쟁의 한계를 드러냈다.
설상가상으로 2026년 1월부터 중국 정부가 전기차 구매세 면제를 폐지하고 5% 세금을 부과하면서 1월 전기차 판매가 전년 대비 20% 급감했다. 도이치뱅크는 중국의 자동차 판매(전기차와 휘발유차 포함)가 2026년 5%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고, UBS는 생산 능력 과잉과 정부 지원 축소로 2%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리미엄 전기차 제조사 샤오펑(Xpeng) CEO 허샤오펑은 “자율주행·인공지능·로봇공학 기술로 혁신 역량을 입증하겠다”며 기술 경쟁 전환에 동참했다.
한국, 기술 우위 있지만 인프라 격차 치명적
한편 지리 오토의 ‘기술 우선’ 전략은 한국 전기차 업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현대차·기아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2020년 6.2%에서 2024년 2.1%로 급락했다. 현대차 아이오닉5·기아 EV6는 가격(5,000만~6,000만 원)이 싱위안(1,000만~1,500만 원)보다 4~5배 비싸 중국 저가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다. 하지만 800V 초고속 충전 기술에서는 한국이 경쟁력을 갖췄다. 아이오닉5·EV6는 이미 800V 시스템을 탑재해 18분 충전 시 80% 충전이 가능하다.
문제는 충전 인프라다. 2024년 말 기준 한국의 800V 초고속 충전기는 1,200기(5.2%)에 불과한 반면, 중국은 약 8만 기를 보유하고 있다. 서울대 기계공학부 차석원 교수는 “중국이 800V 인프라를 빠르게 확충하는 반면, 한국은 인프라 부족으로 800V 전기차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의 2026년 충전기 3,000기 추가 설치 계획도 중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배터리 기술에서도 대응이 필요하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7년 4세대 배터리(에너지 밀도 300Wh/kg, 10분 충전 80%)를 양산할 계획이지만, 중국 업체들도 비슷한 시기 양산하므로 기술 격차가 크지 않다. 한국산업연구원 김용진 선임연구위원은 “중국 시장 포화로 중국 업체들이 해외 진출을 가속화할 것”이라며 “지리·BYD가 동남아·유럽 시장에서 현대차·기아와 정면 충돌하므로, 한국은 800V 충전 인프라 확충과 차세대 배터리 양산 시기 단축으로 기술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 전문가는 “지리의 ‘가격 전쟁 불참’ 선언은 중국 전기차 시장이 가격에서 기술 경쟁으로 전환하는 신호”라며 “한국은 800V 기술을 보유했지만 인프라가 부족해 정부가 2026년 충전 인프라에 1조 원 이상 투자하고, 배터리 업체들이 차세대 배터리 양산을 1년 앞당겨 2026년 말 출시하면 중국·유럽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