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2023년 12월 상징적 가격인 1만 루블(약 14만 원)에 매각했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다시 사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매각 계약에 포함된 2년 바이백 옵션이 2026년 1월 말 만료됐지만, 현대차는 재매입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이로써 현대차는 2010년부터 16년간 운영해온 러시아 공장을 완전히 손에서 놓게 됐으며, 장부가 기준 약 2,800억 원대 손실을 확정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번 결정은 단순한 공장 포기를 넘어, 2004년부터 20년 넘게 구축해온 러시아 시장 지배력을 사실상 포기하는 전략적 철수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지정학적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데다, 현대차 공백을 메운 중국 브랜드의 시장 장악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23.6% 점유율에서 완전 철수까지, 전쟁이 바꾼 운명
현대차의 러시아 진출은 성공 신화 그 자체였다. 2004년 엑센트로 토요타를 제치며 시장 기반을 확보한 현대차는 2007년 현지 법인을 설립했고, 2010년 9월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준공했다.
초기 연산 15만 대 규모로 출발한 공장은 이후 23만 대로 확대됐으며, 2020년에는 제너럴모터스 공장을 인수해 연산 10만 대를 추가 확보했다. 총 33만 대 생산능력을 갖춘 대형 거점이었다.
정점은 2021년이었다. 현대차와 기아를 합쳐 러시아 시장점유율 23.6%로 1위를 기록했고, 연간 판매량은 약 38만 대에 달했다. 누적 생산량은 210만 대를 넘어섰다. 하지만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모든 것이 무너졌다.
서방 제재로 부품 수급이 끊기면서 공장은 2022년 3월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1년 9개월간 공장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현대차는 2023년 12월 19일 임시이사회에서 러시아 벤처캐피탈 아트파이낸스에 공장 매각을 결정했다.
중국 브랜드 장악한 시장, 재진출 명분 사라져
현대차는 매각 당시 2년 바이백 옵션을 확보해 재진출 가능성을 열어뒀다. 전쟁이 종료되거나 제재가 완화되면 공장을 되사서 시장에 복귀할 수 있는 전략적 카드였다. 세계 주요 완성차 업체 중 가장 늦게까지 철수를 미룬 것도 이런 고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2026년 1월 말 옵션 만료 시점이 다가왔을 때,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4년째 지속되고 있고, 서방 제재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더 결정적인 요인은 시장 구도의 변화다. 현대차와 기아가 철수한 이후 러시아 시장은 중국 브랜드가 완전히 장악했다. 라다, 체리, 하발, 지리, 창안 등이 판매 1~5위를 석권하며 시장 판도가 재편됐다. 2023년 기아의 러시아 판매량은 5만 8,238대로 전년 대비 51% 급감했다.
현지 생산이 중단되고 수입차로만 판매하면서 가격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공장을 되찾더라도 이미 중국 업체에게 넘어간 시장을 탈환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상표권 유지하며 ‘최소 활동’… 완전 철수는 아니다
그럼에도 현대차는 “완전 철수는 아니다”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상표권을 유지하며 기존 고객에 대한 사후관리를 계속하고, 시장 상황을 예의주시하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법상 상표권을 3년간 사용하지 않으면 자동 취소되기 때문에, 최소한의 활동은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종료되고 제재가 해제되면 재진출을 검토할 여지를 남겨둔 셈이다.
하지만 업계는 재진출 가능성을 매우 낮게 평가한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러시아 시장은 현대차에게 다시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
2,800억 원 손실은 회복 불가능한 매몰비용이 됐지만, 추가 손실을 막고 자본력을 인도·중동·아프리카 등 성장 시장에 집중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판단이다.